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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Life

나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기본적인 큰 틀로 나누어 보자면 유전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유전적 요소는 DNA, 사회적 요소는 사회관계망 속에서의 일원으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로그래밍으로 비유를 하자면 각각의 요소들은 나라는 객체 안에 들어있는 함숫값이고 이들은 주변의 자극에 따라 결과값(반응)을 산출하는 데에 반응하는 요소들이다. 

 

우선 나라는 존재를 크게 물리적 요소인 신체와 자극과 경험의 요소인 정보의 집합체로 나누어서 분석해 보자.

 

 

1. 정보(경험)의 집합체

 

나라는 주체가 앞서 언급한 산출된 값들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나는 결국 정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말로는 경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정보로 이루어진 나를 분석하기 위한 가정을 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정보(경험)의 누적이라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답은 no다. 가진 정보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시점의 나는 과거 시점의 나보다 언제나 미세하게나마 정보량이 많으므로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의로는 현재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이는 현재라고 생각을 하는 시점으로 정의하는 것이 우선 최선인 것 같다. 즉, 결코 우리는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근접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정보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며 수면 후에 이루어지는 정보처리 과정으로 인해 우리의 정보는 항상 변한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나는 계속 변화되고 있다.

 

 

 

2. 물리적 요소

 

물리적 요소는 부모로부터 각각 받은 유적적 요소인 DNA다. 

우리는 이로부터 복제를 통해서 나의 몸을 유지해 간다.

복제는 내가 섭취한 영양소로부터 이루어지며 섭취한 영양소는 매번 다르고 나의 신체는 겉으로는 같은 형태를 지니지만 육 개월만 지나도 본래 내가 알던 몸이랑은 다른 몸이다. 

즉 비유를 하자면 매장에 놓인 상품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우리가 같은 매장을 방문할 때마다 같은 상품을 보지만 사실 내가 봤던 상품들은 다 팔리고 똑같은 다른 상품들로 대체된 것이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원자단위로 항상 다르게 대체된다.

 

이는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논쟁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논하는 것은 구성성분 그 자체의 특성이므로 신체의 구성요소는 변화하고 있다고 결론짓고 넘어가겠다.

 

즉, 이 DNA라는 정보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는 결국 아미노산으로, 신진대사를 통해 항상 변화한다. 

 

 

 

3. 시간적 변화에 따른 개념

 

모든 변화과정을 포함한 것을 나라고 정의한다면?

선은 점의 집합이고 면은 선의 집합이다. 이처럼 우리의 3차원을 4차원의 공간에서 바라봤을 때, 4차원을 이 3차원 공간들의 집합이라고 가정하면 4차원 세계에서 관찰 시 한 사물의 변화 전체가 그 사물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는 불오나전한 것이 결국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관찰했을 경우에도 나라는 존재 그 자체만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신체의 결손이나 태아의 배아시점 등,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나라는 존재는 시공간 상에서 독립적으로 구분 짓기 힘들다. 

 

즉, 시간적 변화에 따른 나의 개념은 물리적 정보랑 유사하며 변화과정을 포함하는 순간 다른 존재와의 구분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테세우스의 배를 예로 들자면 테세우스의 배는 완성된 시점에서 테세우스 배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재료를 만드는 과정부터 포함되는 것에 대한 정의부터 필요해진다. 완성된 순간이라고 정의한다면 판자 하나만 남기고 전부 부식되어 사라져 다른 재료들을 통해 다시금 형태만 복원했다면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고 그 부품들 하나하나가 테세우스의 배라면 각각이 여러 사물들에 재료로 다시금 사용되었다면 그것들 또한 테세우스의 배로서 각각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즉, 시간적 변화 따른 개념은 앞서 언급한 물리적 요소와 정보의 집합체의 충분조건이다.  

 

 

4. 인식론적인 개념

 

앞서 언급한 내용들에 따르면 정보와 물리적 요소로서의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절대적인 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을 적는 나와 그걸 보는 나 조차도 엄밀히 말하면 다른 존재다.  하지만 보통의 우리는 자아라는 개념을 연속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왜 그런 것인가? 기본적으로 우리는 for함수로 이루어진 반복함수를 지닌 객체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내가 생산해 낸 결과값(경험)은 다시금 나라는 객체에 함수적인 영향을 주고 다른 결과값을 산출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누적된 정보들의 영향으로 나는 스스로를 연속적인 개체로 인식하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주변을 인식할 때 직관적으로 인식하여 실재와 차이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각적 착시 효과가 그 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가 나라는 가상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며 그 존재를 기억함에 따라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나라는 존재는 정보로서 존재한다. 실재 세상과 의식적 세상을 구분하여 생각하면 실재의 나란 존재하지 않고 의식적 세상 속에서의 정보로만 존재하는 존재로 정의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은 굉장히 게으르다. 시각적 착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직관적으로 사물을 구분한다. 그것이 색상의 구분이던 아니면 전자기력의 세기에 따른 구분이던지 간에 뇌는 반복된 학습을 통해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 화상전화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화상전화를 할 당시에 화면에 비친 상대는 실재의 존재가 광자를 통해 내 눈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휴대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흡수 된 빛을 복사하여 스크린에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은 또한 픽셀 단위로 이루어진 집합 즉,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상대방으로 인식하고 감정을 교류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지와 언어나 우리의 지각 능력을 바탕으로 수집한 정보를 형상화한다.

우리가 마트에서 진열된 같은 종류의 상품들도 사실은 각각이 다르지만 우리는 같다고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굉장히 많은 선험적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인식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인식이란 태초의 한 목적성으로 인해 파생한 정보수집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인식의 불완전성은 허구적 개념을 만들어내고 우리를 특정한 것에 동화시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드라마 속 주인공, 게임 속 캐릭터, 상대방, 국가에 공감할 수 있다.  

 

 

 

5. 태초의 목적성

 

결국 우리란 존재도 결국은 왜 존재하느냐, 우리의 인식은 왜 존재하느냐의 물음은 세상의 존재 목적에 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하여 각각의 가지를 생성하여 개념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단순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퍼지기 위해 존재한다. '

단순히 이 한 문장만을 보면 반론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이 떠오르겠지만 이는 '인 투더 쿨'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납득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가볍게 내용을 덧붙여서 반론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을 해보자면 모든 것을 퍼트리고자 할 때 장애물이 생기면 입자들은 뭉쳐서 그 장애물을 넘어서 퍼지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즉, 나란 존재는 세상의 입자를 퍼트리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결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란 존재의 물질적인 정보(dna로 구성된 입자들의 실체)는 실재하나 우리가 가진 나란 개념은 환상이다. 즉,  우리는 물과도 같다. 입자를 퍼트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물리적 조건 내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공감이란 그런 것이다. 담기는 컵에 따라 자신은 바뀐다. 다만 물리적 요소인 실재적 요소의 자극에 따라 본능과 관련된 공식이 발동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신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면 우리는 자신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결국 일종의 공식이다. 버튼을 누르면 결과물을 산출하는 기계처럼 단순한 알고리즘 순서도 그 자체다. 다만 그 내용이 많아 복잡하기에 단순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힘들 뿐이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연적으로 거부하고 실망하게 된다.

이 또한 결국 알고리즘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폄하하던 내용이거나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에 더했던 환상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킬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면 생을 포기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역치가 다르게 조절되어 있다. 반응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정도도 다르다.

이는 입자의 본성이 가장 안정적인 구조로 에너지를 축적하려 하기 때문이고 이는 사람들 간의 역치를 확률적으로 구분해 놓는다. 그리고 그것이 태초의 의식일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를 통해 확률을 조작하여 시뮬레이션을 조작한다면 우리의 입력이 태초의 의식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자아가 환상이라면 만들면 된다. 우리가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라는 신기루를 발견한다면 그 장소에 오아시스를 만들면 된다. 세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그것을 가능케 해 준다. 빅뱅을 일으키는 것과도 같다. 과학적 진보는 상상의 현실화다. 그리고 이는 예술이나 게임 같은 엉뚱한 것들도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언젠가는 존재론적 실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대부분은 발견이지 창조가 아니다. 미지의 것은 무궁무진하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결국 지금의 내용도 현재까지 아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 추리다.

 

따라서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사회가 암묵적으로 그것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분명 나란 존재 그 자체도 일관된 행위와 신념을 바탕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는 다른 차원에서 정보를 생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보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차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념이고 이는 다른 차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전자기력의 경계 속에서 존재하듯이 우리들의 관념 또한 그곳에서 애매모호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세분화하여 정의할수록 그것은 명확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념은 무한히 확장하려 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아는 세상의 본질적인 법칙은 음과 양이라고 생각한다.

심장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여 움직이고 파도가 위아래로 요동치며 파동을 만들어 내듯이 무에서 출발한 우리들은 무한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데아와 비슷한 세상 속에서 아마 나란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란 것이 존재하고 영혼이란 것이 존재하다면 분명 그러한 형태일 것이다.